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38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리비아가 그를 임신했을 때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42년 법무관)|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이혼할 것을 요청했기에 부모는 곧 이혼했다. 이후 어머니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와 1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전남편 티베리우스 네로가 옥타비아누스와 전 부인의 결혼식에 참석해 ‘리비아의 아버지가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아울러 이때 드루수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네로는 옥타비아누스-리비아 드루실라 부부로부터 장남 티베리우스(당시 3세)와 곧 태어날 아이의 친권을 약속받았다. 드루수스는 리비아가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후 태어났는데 역사가들은 그의 출생일을 대략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태어난 이후 유년기때 이름을 데키무스에서 친부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된 이름 '네로(Nero)'로 개명했다. 어머니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후, 이들 부부의 로마 시내 저택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가 태어날 당시, 많은 로마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계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친모 리비아 드루실라가 간통으로 얻은 아들’이라고 의심했고, 실제로 이를 사실로 믿는 로마인들은 상당히 많았다. 따라서 이런 풍자시까지 나돌았다. > 이들 부모는 얼마나 운이 좋은 거야. 아이가 자궁에 겨우 3개월만 있다가 태어났으니. 이 소문과 풍자시는 루머의 당사자 대 드루수스가 태어났을 당시에도 화제를 모았지만, 당사자인 드루수스가 죽은 지 50여 년이 지난 이후 세간의 주목을 더 받았다. 때는 그의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드루수스의 막내아들인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사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자이고, 자신이 양친 모두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좀 더 알리고 싶어했던 목적으로 이를 더 부추겼다고 말한다.[* 아예 클라우디우스는 이를 위해 모계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확실한 '''자신의 조카'''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자신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는 놔두고 소 아그리피나가 재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 즉 자신의 양자와 친딸을 결혼시켜서 후계자로 삼기에 이른다. 이 후계자가 바로 그 유명한 폭군 '''[[네로]]'''이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이름 중 '''드루수스'''는 대대로 세습된 이름이었는데, 그의 조상 중 처음으로 이 이름을 얻은 ‘첫번째 드루수스”가 BC 283년, 1대1 싸움에서 적군 족장 드라우수스를 죽인 후 얻은 영예로운 이름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드루수스'라는 이름은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에서 드루실라의 남성형 이름이기도 했으며 그의 외할아버지(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그의 본가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다.]의 이름이기도 했다. 또 '드루수스'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의 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에게도 계속 전해졌다. 또 다른 이름인 '''네로''' 역시 대대로 세습된 이름이었다. 이 유서 깊은 이름은 그의 직계 조상이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며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메타우루스 전투]]의 승자였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서 따왔으며, 그 뜻은 ‘용감한 자’였다. 드루수스는 결혼식 전의 약속대로 태어난 이후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같이 살지 않고,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친부 티베리우스 네로의 집에서 자라야 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과 달리 드루수스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집에서 태어난 이후, 어머니 리비아와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걸음마를 할 때까지 직접 키웠다. 그래서 풍자시와 원로원 내 소문이 로마인들에게 사실로 확정됐는데,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 부부는 드루수스를 자신들의 집에서 키웠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더 확산되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드루수스를 친부의 집으로 보냈다. 그래서 드루수스는 젖을 떼고 난 이후 걸음마를 할 때부터 친부의 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이때 친부 밑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드루수스가 불과 6살에 불과했을 때 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가 BC 33년 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 9세였던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친권을 가지게 된 어머니가 사는 옥타비아누스의 집에 들어가 성장했다. 이때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거처를 옮기도록 한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였는데, 이는 친권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한다는 이유와 내전이 갈수록 심해진 탓에 두 사람의 신변까지 위협을 겪고 있던 당시 로마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다고 한다. 이들 형제는 어릴 때부터 워낙 우애가 좋아 서로를 사랑했다고 하며 실제로 성년이 된 이후에도 사이가 좋았다. 따라서 그의 친형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첫 아이이자 장남에게 동생의 이름인 드루수스를 붙여줬고, 드루수스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형의 이름인 티베리우스를 붙여줬다.[* 이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아들이 로마의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